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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리본, 미카엘 하네케

Ending Credit | 2010. 7. 13. 00:55 | Posted by 맥거핀.


(이 글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상당 부분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당신의 모든 예측을 뒤집어 놓을 최고의 걸작!'이라는 이 영화의 카피 문구가 조금은 의아하게 보인다. 물론 여기서의 의아함은 그 카피 문구의 '걸작'이라는 말보다는 나머지의 말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과연 이 영화는 무엇을 예측하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관객의 예상을 뒤집는 어떤 반전에 가까운가? 영화를 보고 나면, 반전이라는 것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도리어, 영화는 약간 의아하게도, 그 결말 이면의 어떤 것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게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의 약간은 특이한 구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마을 학교 선생의 술회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마을 학교 선생은 시작부에 의미심장한 말들을 한다. 이 이야기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부분을 담고 있으며, 풀리지 않은 비밀을 담고 있으나, 마을에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이야기는 이 나라(독일)에서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들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연이은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마을 의사는 누군가가 몰래 설치해 놓은 줄에 걸려 낙마하고, 마을 지주(남작)의 아들은 납치되었다가 돌아오며, 또 누군가는 사고로 죽고, 누군가는 불을 지른다. 그리고 급기야는 한 장애 소년의 눈이 도려내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을 주민들은 불안해하며, 공포를 느끼고, 남작은 마을 주민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며, 범인을 찾으려 애쓴다. 즉 이 영화는 한편으로 추리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과연 그 일련의 잔혹한 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화자인 선생은 마침내 범인을 밝혀낸다. 이것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전체 틀이다.

그러나 왠지 이 영화는 그 전체적인 구조를 스스로가 부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유사 추리물에서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점이다. 그러나 감독은 거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하나의 예. 영화의 초반 시퀀스에 사건을 보여준 후, 감독은 마을 아이들이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며, 화자에 의해 그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클라라의 옆에 모여서 걸어가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고 화자는 술회한다. 이것이 범인 찾기라면, 이 시퀀스야 말로 의심스러운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화자에 의해 지목되는 범인은 범인이 아니며 이러한 시퀀스는 관객의 의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또 하나의 이상함.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마을 선생에 의해 서술되는 1인칭 화자의 시점(視點)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의아한 것은, 이 영화에는 마을 선생이 결코 볼 수 없는, 알 수 없는 장면들이 자꾸 서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끝까지 이 1인칭 시점의 구성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짐짓 아이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화자의 입으로 다시 서술하도록 한다. 즉 영화는 전체적으로 전지적 시점의 장면들을 꾸준히 보여주면서도, 화자의 1인칭 시점을 끝까지 가지고 있는 것처럼 관객을 믿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그 1인칭 시점을 의심하게 한다. 그 시점 구성의 기이함. 

아마도 이것이 진정한 추리물이라면 우리는 그렇다면 이제 화자에 대해 의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진실일까. 우리는 그가 내놓은 답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아니,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화자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감독은 그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당신이 답을 못찾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들이 모두 일을 벌였다라고 생각한다면, 답은 도리어 간단하고, 간명하다. 그러나 영화를 그것으로만 단정짓고 영화관을 나서는 것은 감독이 원하는 바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영화 안에서 제시된 사실로만 보자면, 아이들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마을 선생의 의심은 어떻게 보면, 잘못된 추리, 혹은 불충분한 추리 쪽에 가깝다. 아이들이 그곳에 나타났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도리어, 몇몇 씬들이 더욱 모호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에바는 왜 그토록 호수로 가는 것을 꺼렸던가. 산파와 의사는 왜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는가...등등.

...................................

그러므로 가장 올바른 길은 범인 찾기에 골몰하는 것 보다는, 아마도 이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다시 곱씹어 보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감독이 노린 점처럼 보인다. 아주 평화롭고 조용해보이는 이 마을은 이중의 지배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남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제적인 지배와 목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지배. 그러나 이 지배 구조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위선적이고, 이중적이다. 남작은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는 것으로 그들에 의한 지배를 공고히 만들려고 한다. 목사는 종교적인 엄숙주의에 빠진 나약한 인간이다. 그리고 마을에 역시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낙마했던 의사는 아내 몰래 불륜을 저지르고, 그보다 더한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이중적인 위선은 폭력의 지배에 의해, 그 하위로 조금씩 번져나간다. 물론 그 지배 구조의 가장 하위에 있는 인물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폭력의 지배가 불안하고 기이한 틈새를 펼쳐 보일 때, 오스트리아에서 황태자는 살해당했다. 이제야말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파시즘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일까. 글쎄. 다른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보인다고 해도, 적어도 파시즘이 일반 대중의 불만과 불안,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동요를 그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것만큼은 명백하다. 폭력적인 지배가 공고한 이러한 구조에서 불만이 극도로 응축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불신들이 커져간다. 이때에, 그 폭력적인 지배의 정점들이 갑자기 해체되고 나면, 사람들은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을 걸러내고, 허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물론 사실 파시즘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며, 이외에도 다른 여러가지 것들이 여기에 결합된다. 그러나 아무튼 이 영화는 질문을 하고 있다. 왜 파시즘이 하필이면, 이곳 독일에서 출현하여,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그것의 뿌리의 일부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이 묵직한 질문들을 추리극의 외피를 두른 후, 조금씩 조금씩 슬며시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가 던진 이 차곡차곡 쌓인 질문들은 종내에는 관객을 어디에도, 그 어느 인물에도 마음을 둘 수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화자인 마을 선생마저도, 관객이 믿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다. 추리극의 구성으로 보자면, 그가 내놓은 해답을 관객이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는 그가 불충분한 추리를 하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이 영화의 구조도 한 몫을 한다), 한편으로 보자면, 그 역시 모자란, 혹은 사려깊지 못한 어른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꿈을 꾸었다고 항변하는 제자를 경찰에 신고하는 선생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한 한편으로는 그 역시 목사와 남작의 이중의 지배구조에 갇힌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무거운 이야기를 더욱 묵직하게 하는 것은 음악 없이 진행되는 이 이야기의 서술 방식과 흑백의 하얀 화면이다. 미카엘 하네케는 그 소년과 소녀에게 하얀 리본을 둘렀을 뿐만 아니라, 흑백의 화면을 통해 우리 관객들에게도 하얀 리본을 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무거운 어조로 덧붙인다. 그 하얀 리본은 순수를 상징한다고. 파시즘의 광풍에 섰던 자들이 순수한 혈통을 그토록 부르짖은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어느 곳에서도 순수함을 그 주무기로 내세우는 자들이 있다.


덧.
제6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인데, 글쎄, 좋은 영화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황금종려상 감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유럽 애들의 파시즘에 대한 어떤 공포, 그것에 대한 일종의 위약효과가 작용한 것인가.




- 2010년 7월, 광화문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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