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작가(Ghost Writer), 로만 폴란스키

Ending Credit | 2010.06.15 16:26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감상을 방해할, 심각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유령 작가(Ghost Writer)란, 유명인의 뒤에서 유명인의 이름으로 글을 써주는 대필 작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에서는 이를 활용한 영국식 유머가 등장한다. 영화 내내 본명도 등장하지 않는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가 본인을 유령이라고 소개하는 장면. 이 유령작가는 전 영국 수상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집필하던 전임 유령작가가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려 고용되었다. 즉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유령작가는 이중의 유령인 셈이다. 전면에 나온 아담 랭의 유령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전임 작가의 유령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유령작가가 네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라 미지의 장면을 찾아가는 장면은 꽤나 흥미로운 설정으로 보였다. 죽은 자의 지시를 받는 죽은 자의 유령이라. 그래서 어쩌면, 이 유령작가의 운명은 거의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죽은 전임 유령작가를 대신하여,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로 결심하던 때부터 이 유령작가의 마지막 운명은 아마도 거의 정해진 것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더구나 이렇게 사람 쉽게 믿고, 쉽게 말하는 유령작가라면 말이다.
(아니, 그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진실을 밝혔는데, 입다물고 도망가지 않고, 그 쪽지질은 뭐람. 아무리 정치를 모른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유령작가의 운명을 따라가는 것은 거의 히치콕식 맥거핀을 쫓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히치콕식 스릴러에 비교하는 리뷰들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자동차 추격씬이나, 주인공의 성격과 같은 몇몇 부분들을 짚어야 하겠지만, 이 맥거핀들의 활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범인찾기와 같은 것들. 전임작가를 죽인 것이 누구인가를 밝혀내는 일련의 과정들은, 사실 이 영화에서는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를 죽였는가가 아니라, 왜 그를 죽였는가이다. 사실 누가 그를 죽였는가라는 질문은 거의 답이 나와있는 쉬운 질문이다. 물론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담 랭은 범인이 아니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장 그를 죽일만한 개연성이 높은 인물은, 거의 대부분 답이 아니다. 뭐 아무튼 간에. 중요한 것은 왜 그를 죽였는가이다. 그리고 거의 늘상 그렇듯이, 그 단서는 매우 가까운 것에 있었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그것에 말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의 성패는 그 마지막 진실이 얼마나 무게 있는 펀치인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글쎄. 하지만 나로서는 그에 있어서는 좋은 점수를 주지는 못하겠다. 영국이 거의 미국의 2중대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뉴스거리인가. 전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의 얼굴을 한 개가 부시의 손에 들려있는 사진은 이미 더 이상 조롱거리도 아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그보다 약간 반 걸음 정도 더 나아가고는 있지만, 그렇게 묵직한 펀치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것을 말해주는 장면이 영화에는 이미 있다. 유령작가가 구글링을 통해 몇몇 결정적인 단서들을 찾아내는 장면들. 구글링만 해도 나오는 것이 무슨 그리 대단한 펀치? 그리고, 솔직히 나는 약간 실소가 나왔다. 고용된지 며칠되지도 않은 유령작가는 구글링을 통해 중요한 단서들을 잘도 찾아내는 데, 그의 오래된 정적(政敵)들은 도대체 그 오랜 시간, 무얼하고 있던걸까.
 
아마도 이 영화의 의미는 그보다 다른 데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튼 그 모든 진실이 결국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만다는 사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알아볼 수 있는 유령작가는 결코 전면에 나설 수 없다는 것,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진실의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거의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유령 작가라는 의미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유령 작가는 뒤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때만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유령 작가가 전면에 나서려고 한다면, 그 유령 작가의 운명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타의에 의해 진짜 유령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쩌면 가장 큰 맥거핀은 이 영화의 제목일 것이다. 과연 진정한 유령 작가는 누구인가? 아담 랭의 뒤에서 그의 삶을 써내려가던 거대한 유령 작가는 과연 누구인가.


아무튼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를 히치콕식 정치 스릴러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약하지만, 아마도 영국식 블랙코미디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에 의해 반복되는 몇몇 말장난들도 그렇고, 몇몇 정치적인 유머들도 그렇다. 예를 들어, 전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를 연상시키는 배우를 미국 국무장관 역에 배치시키는 것이나, 국제사법재판소를 따르지 않는 몇몇 나라들이란 오로지 미국과 그 적들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이는 로만 폴란스키의 미국에 대한 영화적인 소심한 항변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 2010년 6월, 씨너스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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