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 2024/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시(poetry), 이창동

Ending Credit | 2010. 6. 5. 02:40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 있음)


이창동의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러 가야지, 보러 가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이창동의 영화는 늘 그렇듯이 영화관에 앉는 것을 매우 주저하게 만든다. 그러나 약간은 놀라운 것은, 일단 앉고 나면, 이창동의 영화는 늘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신비한 체험을 이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그 무아지경은 사라지고, 다시 모든 것들을 무섭게 헤집어 놓는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는 이창동의 데뷔작 <초록물고기>부터 시작해서, 모든 DVD를 가지고 있지만, 그 DVD들에 손이 가는 적은 거의 없다. 이창동의 DVD를 집어드는 것은 각오를 해야하는 일이다. 최소 며칠간 머리를 헤집어 놓을 거라는 각오를 해야하는 일이다. 

영화의 시작. 노는 아이들 옆으로 무심하게 강물이 흘러간다. 그리고 그 강물에 한 소녀의 시체가 조용히 밀려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평온한 세상, 그 평온한 세상에 밀려오는 무거운 질문들. 이 시작은 마치 내용은 많이 다르지만,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의 오프닝을 연상시킨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황금들녘. 아이들이 뛰노는 그 한가운데에서, 박형사(송강호)는 찌푸린 얼굴로 배수로 속을 들여다본다. 거기에 다시 어떤 무거운 질문이 있다. 그리고 약간은 놀랍게도, 이 영화 <시>의 마지막 역시, 조금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박형사는 정면으로 관객을 응시하며, 뭔가를 묻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혹자의 말처럼 범인은 지금 어디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일수도 있고, 관객들에게 던지는 어떤 경고의 메시지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의 마지막에서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소녀는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살인의 추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소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소녀를 구해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소녀가 묻는 질문에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 질문이 무엇인가.

이 영화는 이창동의 전작들과 약간은 맥이 닿아 있다. 예를 들어 <오아시스>나 <밀양>같은 것들.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오아시스>에서는 가해자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밀양>에서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다시 <시>에서는 가해자와 연루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연루되었다는 것. 직접적인 가해를 하지 않았지만, 가해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 글쎄. 이창동은 이를 단순히 주인공 미자(윤정희)로 한정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중에 좀 더 말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는 거의 공범에 가깝다고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많은 사람들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무튼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요한 포인트는 어떤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이며, 그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이다. 이 시라는 것의 의미. 많은 리뷰들에서, 이 영화의 도덕과 아름다움 사이의 진동을 이야기한다. 즉 시의 도덕과 시의 아름다움 사이의 진동. 예를 들어 그 진동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장면은, 피해자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 미자가 거의 무의미한 아름다움을 늘어놓은 다음, 뒤돌아 나오다가 아프게 깨닫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시의 이 아름다움이라는 속성, 그리고 도덕이라는 속성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시가 곧 아름다움이고, 그것이 곧 도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의 말들은, 이를 푸는 하나의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은 말한다.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먼저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리고 누구의 마음 속에나 이미 시는 존재하고 있다고, 그를 끄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이 말은 몇 가지를 생각나게 하는 점이 있다. 먼저 하나. 이 말들은 약간은 신기하게도, 도덕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위의 김용탁 시인의 말들에서 '시'라는 말을 '도덕' 혹은 '양심'이라는 말로 대체하여 보라. 거의 의미가 그대로 통한다. 누구의 마음 속에나 이미 도덕은 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공중도덕을 지켜야 하는 것을 알고 있고, 노인을 공경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약자를 배려하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물론 여학생을 성폭행하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문제는 아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끄집어내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 '보는 것'의 문제.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도덕을 지키기 위해서는 역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일까. 그리고 이 '보는 것'의 문제는 대학 시절 교육철학 수업의 어떤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을 떠올리게 만든 것은, 영화 속 미자가 듣는 김용탁 시인의 시 강의 형태를 보면서이다. 처음에 나는 약간 웃었다. 참 시 강의라는 게 거저 먹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그저 강의라는 것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사과를 들고 잘 보라고 한다음, 수강생 한 명씩 불러내어 '가장 아름다웠던 일'을 떠올리게 만들면 되는 거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 다음, 조금은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시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어떤 은유를 사용하는 기법이나, 운율을 맞추는 법 등등에 대해서는 일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 그것으로 쓸 수 있는 것인가. 시가 그것으로 가능한 것인가. 글쎄.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도리어, 어떤 배움으로 가능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천재성의 문제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시는 어떤 의미에서는 수학과 조금 비슷한 성질의 것이 아닌가 싶다. 수학의 천재성은 대체로 젊은 시절에 발현되며,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간다. 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젊은 시절에 빛을 발하고 요절한 수많은 시인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소설과의 차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소설은 시와 달리, 나이가 들수록 더욱 원숙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는 시와 달리, 소설은 가르쳐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다시 옛날로 돌아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도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

이는 대학 시절 교육철학 부분에서 상당히 내 흥미를 끌었던 주제였다. 플라톤의 대화편 <메논>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성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결론을 내린다. "덕성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오직 신의 시여(施與)에 의해서 인간이 얻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꽤나 복잡한 문제라, 이야기를 하려면, 비트겐슈타인까지 끌고 들어와야 하며, 잘 얘기할 자신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도덕을 (시와 마찬가지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에는 어떤 의문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반복하자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발휘하는가, 혹은 발현하는가의 문제이다. 배워서 알고 있지만, 전혀 그것을 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아무튼 이 논의 속에는 '일러주는 것'과 '보도록 하는 것'을 구분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이는 다시 이창동의 <시>의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도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 가르쳐질 수 있다면 그것은 '보는 것'으로 가능한가. 그것이 아니라면, 도덕은, 혹은 양심은 도대체 무엇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

시 때문에 우세요? 시 못써서? 영화 속 시 동호회의 일원인 박 형사는 미자에게 묻는다. 그러나 미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 운다. 이 질문은 마치 내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도덕 때문에 우세요? 도덕을 지킬 수 없어서? 도덕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은 울어야 한다. 그것이 이창동의 하나의 태도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그렇지 않다. 영화 속 시인은 술자리에서 한탄하듯 내뱉는다. 시는 죽었어. 그래도 싸. 그것 역시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린다. 도덕은 죽었다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시는 정말 거의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도덕도 거의 마찬가지로 죽어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도덕이란, 이창동이 말하듯이, 아마도 가르쳐질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여학생을 성폭행해서는 안된다, 는 식의 어떠한 것, 즉 규범을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 몇 개의 힌트가 될 수 있는 장면이 영화 속들에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부. 미자가 찾아간 병원의 텔레비전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자식을 잃은 슬픔,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에 대해 둔감하다. 그리고 이 둔감함은 병원 밖으로 나오며 그대로 이어진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이를 어떤 하나의 구경거리로 바라볼 뿐이다. 이 장면에 조금은 심각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미자 뿐이다. 미자는 심지어 손자에게 그 소녀에 대해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기까지 한다. 그러나 미자도 겨우 그 정도 뿐이다. 그 정도 관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미자는 시 강의를 듣는다. 그러나 여전히 미자는 시를 쓰지 못한다. 그리고 시를 쓸 수 있기를 계속 갈망한다. 그리고 영화의 거의 마지막, 미자는 시를 써내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클래스의 다른 사람들은 같이 시 수업을 들었음에도 아무도 시를 써내지 못했다. 그 차이.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미자가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의 손자의 문제였기 때문이 아니었겠냐고 말이다. 그러나 영화 속 기범 아버지(안내상)는 조소하며 되물을 뿐이다. "시를 왜 배워요?"

시를 쓰는 것이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나는 아마도 그 반대가 더욱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도덕적인 인간이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말이 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무튼 나는 시에 대해서는 잘 이해해 본 적이 없으니까. 어떤 시가 왜 좋은지 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이창동은 거의 용감하게, 무모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덕적인 인간만이, 시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은 일단 '잘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잘 보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의 말대로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만져도 보고, 먹어도 보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배드민턴을 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것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이창동은 말한다. '어떤' 도덕이 유지되는 것(혹은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그것은 아름다움이며, 그 아름다움의 하나의 모습은 시라고 말이다. 가장 도덕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이다. 누군가는 이창동의 이 영화 <시>가 거의 중세의 도덕극을 연상시킨다고 말하였으나, 이쯤되면 거의 이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어떤 말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극도의 아름다움, 즉 완성된 미(美)는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덕이 충일한 것, 그들은 그제서야 그것에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론 여기서의 덕(arete)은 이창동의 '덕'과는 다른 것이겠지만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거의 숨을 쉴 수 없게 한다. 미자의 목소리는 어느틈에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고, 소녀는 고개를 돌려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 때 소녀는 관객에게 거의 정면으로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놀라운 체험. 그렇게 영화 속 관객들은 미자가 가해자와 연루된 것과 같이, 다시 미자에게 연루된다. 그렇게 우리는 이 현대사회에서 공범이 된다. 세상 모든 약자들에 가해지는 것들에 대하여 말이다. 소녀는 묻는다. 당신은 시를 쓸 수 있습니까. 나는 노트에 반복하여 쓴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닙니다. 그러나, 그래도 언젠가는 노력을 해봐야겠지요. 명사를 잃고, 그 다음에 동사를 잃기 전에 말입니다.





- 2010년 6월, 대한극장.

'Ending Cred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수길, 정재훈  (0) 2010.07.02
유령 작가(Ghost Writer), 로만 폴란스키  (0) 2010.06.15
하녀, 임상수  (2) 2010.05.26
하하하, 홍상수  (2) 2010.05.12
계몽영화, 박동훈  (0) 2010.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