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 2010.01.08

은평구 응암2동 철거 장면을 담은 <호수길>이 요구하는 것 

 

올해 일년 동안 한국영화의 이미지가 무엇이었느냐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그냥 간단하게 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국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내내 이 집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그냥 다시 저 집에 들어간다고 느낄 정도였다. 먼저 세편의 영화. 가장 무서운 집.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감독 구경남(김태우)은 낯선 제천에서 하는 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친구 부상용(공형진)을 만난다. 그리고 한밤중에 그의 집을 방문한다. 그는 이상한 아내 유신(정유미)과 살고 있다. 이 집은 문턱을 넘을 때마다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아무리 앞과 뒤를 따지려 들어도 일시에 이 모든 시도를 와해시키면서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서부터가 착각인지 알 수 없는 마술적 상황으로 끌고 간다. 숏 사이의 접속이라는 몽상. 말 그대로 귀신들린 집. 가장 이상한 집. 박찬욱의 <박쥐>. 신부 상현(송강호)은 친구 강우(신하균)의 집을 찾아간다. 나는 이 영화를 두번 보았지만 아무리 맞추어보아도 일층과 이층의 면적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 가분수의 집은 거의 쓰러질 것만 같다. 이층은 과밀하게 우굴거리고 일층은 대부분 비어 있다. 도무지 올라갈 방법을 알 수 없는 이층. 올라온 다음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서 마치 자기 증식이라도 하듯이 늘어나는 방들. 도대체 이층에는 몇개의 방이 있는 것일까? 이야기를 따라 전개되는 것 같은 복도. 라 여사(김해숙)는 비밀을 알고 있을까? 태주(김옥빈)가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장 음란한 집. 봉준호의 <마더>. 낮에도 거의 밤처럼 어두운 집. ‘마더’(김혜자)는 자기 집에서 이불을 펴고 아들과 한번 하고 싶은 마음을 고백하지 못할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핑계이다. 도준(원빈)의 방에서 한밤중에 윗옷을 벗은 친구 진태(진구)가 걸어나와서 그녀를 껴안을 때 그녀가 정말 안아주기를 바랐던 사람은 누구일까? 두명의 이중효과, 혹은 착시효과. 이때 어느 쪽이 환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뒤에서 얼굴을 보지 않고 안을 때, 도준과 ‘마더’가 몇 차례이고 그 체위를 반복하면서 이불에서 껴안을 때,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때, 위반의 선을 마지막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잠과 꿈. 무의식과 환상. 죽음과 섹스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이 음란한 환상을 건너지 않고 ‘마더’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의 집들을 생각하다

물론 다른 집도 있다. 또 다른 세편의 영화들이 다루는 집. 이를테면 박찬옥의 <파주>. 은모(서우)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중식(이선균). 그는 왜 환대받지 못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 왜 은모는 자기 집에서 주인이 아니라 손님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혹시 그 집이 환대하지 않는 사람은 중식이 아니라 은모가 아닌가? 시간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혹은 할 수 없다. 플래시백으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집.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집. 그런 다음 폭발시켜버린 집. 그때 정말 폭발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와중에 진행되는 철거. 집을 부순다는 문제. 혹은 철거 용역에 몸담은 상훈(양익준). 내면 속의 지옥과 같은 두채의 집. 상훈과 연희(김꽃비)의 집. 집을 부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도시의 변경에서 부서져가는 집. 쫓겨나는 사람들. 집에서 쫓겨나면 어디서 살아야 할까. 양익준의 <똥파리>. 미쳐버린 동생, 혹은 신들린 동생을 찾아서 돌아온 언니 희진(남상미)이 마주해야 하는 집. 아파트라는 집. 그 집의 수상한 이웃들. 이용주의 <불신지옥>.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들은 어쩔 수 없이 집에 관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올해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에 세워진 5층 상가에서 새벽 6시45분에서 8시30분 사이, 고작 1시간45분 만에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죽었고 23명이 부상당했다. 집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 전선이다. 그것은 육체이며, 삶이며, 실제의 현실이다.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되고, 시작되어야만 하며, 거기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집은 삶의 크기이며 그것을 탈취당할 때 삶도 도둑질당할 것이다. 집의 전유와 재전유에 대한 전술을 우리는 공유해야만 한다.

왜 이 영화를 무조건 긍정하고 싶은가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에 긴급하게 한편의 영화를 추가하고 싶다. 그냥 간단히 말하면 이 영화는 올해의 발견이자 최전선이다. 정재훈의 다큐멘터리 <호수길>은 마치 이 모든 비밀회의에 가까운 유령들의 난국을 타개해야 할 방법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황을 수정하려고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무조건 긍정하고 싶다. 한국영화가 건축적 구조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일 때 거의 오로지 혼자서 <호수길>은 전혀 다른 지리적 탐사를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호수길>의 선언이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지식도 필요없다. 그냥 같은 시대에 같은 지리적 동네에서 함께 공존한다는 의식만 갖추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허깨비가 아니다. 영화 제목 <호수길>은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의 골목 이름이다. 영어 제목도 ‘Hosu-Gil’이다. 이게 골목 이름이긴 하지만 이 동네에는 호수가 없다. 아마도 예전에는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이 길을 따라가 보아도 호수는 나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있었지만 없어진 것. 그리고 이 영화는 지금은 있지만 없어져가는 것에 관한 영화이다.

<호수길>은 간단하지만 소개하기에 까다로운 영화이다. 그래서 시네마디지털서울 신은실씨의 소개가 조금 길긴 하지만 대신 인용할 생각이다. “낮에 나온 반달이 뜬 하늘과 산이 보이는 동네에는 ‘호수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목이 있다. 사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동네에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한편, 볼일 보러 집을 나서는 아주머니, 산책하는 젊은이와 소년 소녀들, 텃밭을 일구는 아낙들, 마실 나온 할머니,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엄마가 있고, 때로는 경찰차가 동네를 오가고, 개와 고양이도 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네의 마지막 불빛이 꺼져버리고, 갑자기 빛이 번쩍이자 빈집 천지가 되어버린 동네를 부수는 굉음이 들려온다. 개는 먹이를 찾아 헤매고, 고양이는 죽음을 맞는다. 빈집에서는 불꽃과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하고, 불도저와 인부들은 물을 뿌려가며 동네를 계속 부순다. 햇빛은 강하게 빛나고, 새들도 동네를 떠난다.” (시네마디지털서울2009 카탈로그, 105쪽)

시적인 소개의 문장들. <호수길>에는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도 없다. 물론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분명하게 들리는 소리는 그저 동네 어귀에서 개짓는 소리뿐이다. <호수길>의 마지막 자막은 다음과 같다. “이 영화의 촬영은 2006년 가을부터 2007년 봄까지, 그리고 2008년 2월26일, 7월10일, 2008년 8월부터 11월까지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SF영화같아보이는 이유는

<호수길>은 2년 동안 촬영한 영화이다. 그건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때 이 시간에 대해서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호수길>은 자기 운명을 알고 있는 영화이다. 정재훈은 취미로 자기가 사는 동네를 찍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재개발 지구로 결정되어서 사람들이 이주하고 텅 빈 동네에 혼자 남아서 이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간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영화. 그러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바라보면서, 상황에 대한 그 어떤 방어능력도 없이 할 때 매우 복잡하게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다. “동네에 어느 날부터인가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기분이 나빠졌어요. 그래서 촬영을 시작했지요.”(2009년 11월7일 관객과의 대화) 물론 이 말은 비유이다. 이 영화에는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이 단 한숏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 나는 정재훈의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 장르영화에서 악당들을 한눈에 알아보기 위해서 사용하는 인덱스. 혹은 공동체 커뮤니티에 나타난 낯선 이방인들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소도구 컨벤션. 그는 왜 그런 비유를 사용한 것일까?

정재훈이 촬영을 시작한 첫날은 아무리 빨라도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이 재개발지구로 결정된 다음일 것이다. 말하자면 행정적 결정이 난 다음에 시작된 영화. ‘포스트’로서의 영화. 이미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결국 떠나가야 하는 결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아이들. 물론 영화는 단 한번도 그들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좀더 정확하게 카메라는 동네 주민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마치 낯선 혹성에 와서 탐사를 하는 듯한 카메라. 당신은 이 영화가 우주로부터 불시착한 것처럼 시작한 첫 장면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자꾸만 <호수길>이 SF영화처럼 보인다. 정재훈은 언제나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 있고 그들과 카메라의 거리는 그들이 하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 가청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그래서 목소리는 들리는데 말이 없다. 말의 바깥에 있을 때 대상은 풍경의 일부가 된다. 망원렌즈로 담은 사람들은 카메라의 마이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정재훈은 카메라의 거리감과 거의 동일한 마이크의 사용을 통해서 시각과 청각 둘 사이의 거리감을 일치시킨다. 그렇게 물러났을 때 영화에서 남는 것은 동사뿐이다. <호수길>은 오로지 동사들만이 존재하는 표면효과만을 따라가고 있다. 우리는 표면을 본 다음 그 안의 현실에서 작동하는 인과관계를 따져 물어야만 이 영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말하자면 <호수길>을 보면서 나를 집중하게 만들었던 표면효과들의 예. 정재훈은 철거를 사건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는 시위에 관심이 없다. 틀림없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갈 데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길>은 고요하게 진행된다. 동사무소 직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행정적 작동) 측량 기사들의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수행적 장치). 물론 전경들도 나타나지 않는다(사건의 변수). 먼저 첫 번째, 은평구 응암2동은 지방 시골에 있는 폐쇄된 동네가 아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면 종로3가에서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는 서울 안의 거주지역이다. <호수길>에서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 그러니까 시작하고 난 다음 42분이 될 때까지 이 동네의 생활을 찍은 장면들에서 신기할 정도로 남편들, 혹은 아버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영화를 본 다음 정재훈을 만났다. “이 동네에 출근하듯이 가서 찍은 건가요?” 말하자면 촬영을 정해놓은 시간대가 있느냐는 질문의 우회. 그가 대답했다. “아뇨, 전 이 동네에 살면서 찍었습니다.” 정재훈은 남편들이, 혹은 아버지들이 거리에 보이는 시간대를 피해서 찍었다(또는 그것을 편집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 사실 때문에 마치 이 동네가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분리되어 나온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영화의 후반부, 이 동네를 때려부술 때 비로소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배제 상태의 진행은 다큐멘터리에서 신기한 결정이다.

전술로서의 핸드헬드, 이 긴급함

그 다음 두 번째. <호수길>의 자막에 따르면 영화는 “2006년 가을에서 2007년 봄까지. 그리고 2008년 2월26일, 7월10일, 2008년 8월부터 11월까지” 찍었다. 이 기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모두 담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치 은평구 응암2동은 날씨의 변화가 전혀 없는 동네처럼 보인다. 언제나 화창하게 갠 맑은 날씨. 단 한 차례의 비도 오지 않으며, 겨울 내내 단 한번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아니, 흐린 날씨조차 없다. 여기는 캘리포니아가 아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살면서 이렇게 맑은 날씨를 볼 수 있는 날이 흔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말의 방점은 서울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맑은 날씨로 설정하면 그걸 여러 날에 나누어 찍을 때 숏을 연결시키는 일이다. <호수길>은 단 하루로 설정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사건도 없이 그 동네의 일상을 찍었다. 장면 사이의 극적인 연결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동네의 날씨는 언제나 맑게 개어 있을 뿐이다. 맑은 하늘. 구름조차 없는 날씨. 다만 가끔 바람이 분다.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

<호수길>의 첫 장면은 낮달이 보이는 하늘이다. 낮에 달을 보다니. 그런 다음 마치 카메라는 거기서 추락하는 무언가를 뒤쫓듯이 지구로 내려온다. 아니, 자신이 추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로 내려온 다음부터 카메라는 항상 멈춰 서서 찍고 있다. 우주선이 고장 난 것일까? 그 자리에서 옆으로 팬을 하거나 혹은 틸트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은 극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다. 두 가지 뜻. 극영화는 그렇게 인물을 세워놓거나 아니면 프레임을 정해놓고 동선을 설계했다는 뜻이다. 다른 뜻. 다큐멘터리에서 일단 카메라가 서면 그걸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인물을 쫓아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때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그 장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 장소의 느낌, 시간의 흐름.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인물을 쫓아가느라 바쁘고 사건을 다루느라 매달리는 동안 정재훈은 응암2동을 느껴보고 있다.

정재훈은 <호수길>을 세 가지 방식으로 찍었다. 하나는 카메라가 고정해서 서 있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42분10초 이후, 그러니까 철거 ‘이후’부터 손으로 들고 찍은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대조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잘못 느꼈으면, 이라고 바라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아마도 정재훈은 할 수만 있었다면 나머지도 모두 멈춰 서서(fixed) 찍었을(camera) 것이다. 그런데 철거 ‘이후’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때 움직이는 이유, 혹은 손으로 든 이유는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선 미학적 근거. 앞부분의 멈추어선 카메라는 그 동네의 일부처럼 보인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그 동네의 시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거기 서 있는 오래된 건물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런 다음 철거가 시작되자 카메라는 자기가 의지할 데를 잃어버린 것처럼, 자기의 근거를 상실한 것처럼 흔들린다. 표류의 상태. 자기가 살던 장소가 낯선 공간이 되었을 때 겪어야 하는 고향이라는 지평의 상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사람들과 전혀 말을 나누지 않는 마이크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그 다음 실용적 이유.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철거현장에 단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카메라를 들이댄 지 채 십분이 지나지 않아 누군가에게 촬영을 제지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철거 현장은 이상하게도(당연하게도?) 마치 사건 현장처럼 그것을 은폐하려고 한다. 혹은 그 정도라면 운이 좋은 경우이고 카메라를 압수당하거나 신분을 물어본 다음 왜 여기서 촬영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 못하면 신고를 당할 수도 있다. 카메라를 세워놓으면 갑작스러운 충돌 혹은 압수로부터 달아나기 어려울 것이다. 손으로 들고 찍을 때에만 확보할 수 있는 시간. 게다가 <호수길>은 대부분 혼자 촬영하면서 진행되는 영화이다. 말하자면 손으로 들어야 하는 상황. 전술로서의 핸드헬드. 이 긴급함. 깨져버린 평화. 고요함 뒤의 위기감. 마치 정지된 것처럼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손으로 들고 찍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호수길>이 담고 있는 ‘이후’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오가와 신스케의 유명한 테제.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를 다루는 손과 발은 그 영화의 세계관이다. <호수길>은 그것을 실천한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이전’ 장면의 멈추어 선 숏에서 갑자기 인서트처럼 개입하는 줌의 사용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것이다.

기대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정재훈의 첫 번째 대상. 지구로 내려온 카메라가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벌레와 움직이는 나뭇잎들이다. 거기에는 아직 사람이 담기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들.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 물론 이 영화는 자연을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운드는 거의 들리지 않고 응암2동의 골목을 보여주는 프레임들은 마치 <스틸 라이프>의 구도에 가깝다. <호수길>은 같은 화면을 일정하게 되풀이하면서 반복해서 보여준다. 어떤 학습효과. 우리는 이 동네의 풍경을 마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일정한 간격의 진행에는 우리가 충분히 그 풍경을 보았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화면이 바뀐다. 그 안에 담긴 삶의 리듬감. 동네의 소리들이 매우 작게 녹음된 화면들은 시작하고 4분40초가 지나서야 비로소 마치 스며들듯이 분명하게 들린다. 저물어가는 여름, 혹은 이미 시작된 가을. 골목 계단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면 아줌마와 소녀가 계단을 걸어내려온다. 그 둘의 사이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도 없기 때문이다. 그 둘은 지나가면서 흘낏 카메라를 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재훈은 개의치 않는다. 카메라는 이 계단에서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린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 그 시간에 여기를 지나갔고 그렇게 그들이 지나가기를 내버려둔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을 설명할 생각도 없다. 정재훈에게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담는 것이다. 이 순간 지나가는 두 사람은 이 시간에 나뭇잎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동일한 세상이라는 리듬의 일부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호수길>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호수길>에 관한 그 어떤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할지라도, 그러니까 ‘이후’ 철거가 시작되는 참혹한 장면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할지라도, 당신은 이 영화에서 감도는 이상한 불길함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를테면 무언가 일촉즉발의 느낌. 이토록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매일 사건과 마주하는 것이다. 사건이 없는 서울의 풍경은 우리를 긴장시킨다. <호수길>은 낮의 풍경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한밤중으로 건너뛰어들어간다. 어떤 조명의 도움도 없는 촬영. 그저 골목에 켜진 가로등, 혹은 대부분 불이 꺼진 동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영화 혼자 깨어 있는 것은 대부분 이유가 있다. 거기 무언가 기다려서 보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장면들은 아주 깊은 밤, 거의 대부분이 잠든 밤까지 기다려서 찍은 것 같다. 왜냐하면 불을 켠 집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외로운 섬처럼 불이 켜진 집.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 이제는 살지 않는 아이들을 기억하라

그러면 다시 <호수길>은 낮 시간으로 옮겨간다.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 두 번째 낮은 이 동네의 작은 텃밭에서 (무언가를) 경작하는 할머니와 아저씨의 모습이다. 이때 카메라는 갑자기 줌으로 다가간다. 좀 갑작스러워서 느닷없게 느껴지는 줌은 우리에게 지금 카메라가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에 대한 물리적 확인처럼 보인다. 정재훈은 줌으로 다가가서 무언가를 잘 보려는 생각이 아예 없다. 텃밭에 있는 할머니와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무얼 보여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골목길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 밤을 맞는다. 앞에서 본 밤 장면과 똑같진 않지만 그러나 같은 태도를 갖고 밤을 지새운다. 물론 이 장면이 밤을 지새우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오랫동안 찍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동네의 고요한 시간대를 찍기 위해서 기다려야 하는 카메라는 도리없이 밤을 새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시간을 찍기 위해서 기다리면서 보내는 시간. 두개의 시간. 기다리는 시간(의 두께). 촬영한 시간(의 순간).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서 어떤 사건도 보지 못한다. 혹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출현도 없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지키는 것일까.

그런 다음 다시 낮. 같은 리듬의 반복. 저 멀리 할머니 한분이 걸어가고 있다. 지팡이에 의지해서 가까스로 걸어갈 정도로 불편한 걸음걸이. 그렇게 걸으면서도 힘겨워서 자꾸만 다른 한손으로는 벽에 기댈 만큼 힘겨운 걸음. 지켜보던 카메라는 그때 갑자기 움직이면서 할머니에게로 줌인한다. 우리는 등 뒤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할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본다고 해서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줌으로 쫓아가던 카메라는 특별하게 무얼 보려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번 더 줌인을 한다.

두번의 줌인. 지나치게 멀리서 줌을 해서 심지어 화면의 질감에 픽셀이 묻어나는 게 보일 정도이다. 흔히 말하는 ‘화면이 뭉개지는’ 거리까지 다가간다. 이례적인 방법. 우선 정재훈은 할머니(의 행동이나 동선)을 훔쳐볼 생각이 없다. 할머니는 그저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줌은 둘 중 하나이다. 이 줌인은 대상의 방법을 기억시키는 기호이다. 같은 말의 다른 말. 여기서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줌의 방법을 보라는 뜻이다. 혹은 이러한 방법으로 보는 대상은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모든 대상을 이런 방식으로 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거의 멈춰 서서 진행되는 숏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리듬감이다. 이 줌인은 대상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느낌이 들기는커녕 그 화질 때문에 오히려 대상과 카메라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 장면이 <호수길>에서 어떤 전환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다시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간다. 놀이터에서 잠든 할머니. 아이들의 노는 소리. 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그리고 같은 구도가 되풀이된다. 우리는 화면의 변화에 대해서 점점 민감해진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할아버지는 두터운 옷을 입었고 나뭇잎들은 단풍이 들었다. 세 번째 마주치는 밤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불길한 밤이다. 밤거리에 불빛도 없이 개가 짖고 있다. 개는 낯선 사람을 가장 먼저 알아보는 짐승이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먼저 소리칠 때, 지금 여기에 들어선 낯선 자를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낯선 자들.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 되풀이되는 낮 장면. 우리가 이미 보았던 계단 길. 골목길을 올라오는 소녀. 아이들은 종종 카메라를 쳐다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눈 마주침이 영화와 인물 사이의 어떤 이화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저 거기 있는 나무가 눈을 돌려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인사를 하는 것 같은 친화감. 그런 다음 <호수길>에서 가장 이상한 숏이 등장한다. 몇번이고 반복되는 응암2동의 전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롱숏 장면이 아이들의 얼굴과 디졸브된다. 교과서적으로만 말하면 디졸브는 추억의 입구이거나(플래시백의 시작) 두개의 장소 혹은 사건을 연결할 때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런 다음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찍는다. 여기서는 망원렌즈로 찍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카메라와의 접촉을 허락한다. 아이들은 유심히 바라보다가 차례로 다가와서 카메라를 만지기도 한다. 마치 기억의 소환과도 같은 순간.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서 함께 생각하도록 요구할 때, 나는 이 롱숏의 집들이 다름 아닌 클로즈업의 아이들이 사는 장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롱숏과 클로즈업의 매듭. 차라리 단일한 결합. 숏으로 나누고 그런 다음 재결합. 그러나 두개의 숏이 디졸브 형식을 가지면서 만들어내는 유령효과. 유령들. 거기 이제는 살지 않는 아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불길함, 혹은 사태를 예견함

그리고 다시 우리가 몇번이고 보았던 그 골목길. 동일한 프레임. 멀리 떨어진 카메라(와 마이크). 아줌마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아이들이 그 길에서 뛰어논다. 저 멀리서 오던 할머니는 힘에 부치는지 중간에 놓인 침상에 앉아 쉰다. 6분40초 동안 그저 그 자리에서 지속되는 이 장면은 앞부분, 그러니까 철거가 시작되기 ‘이전’ 장면 중에서 가장 길다. 하지만 이 장면은 플랑 세캉스가 아니다. 마지막 순간 갑자기 줌으로 잡아당긴 아이의 얼굴 클로즈업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면 이제 평화로운 장면은 모두 끝났다. 우리가 영화에서 처음 보는 저녁 장면. 몇번이고 보았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응암2동의 전경. 동네 여기저기에 불빛이 들어온다. 다시 밤 장면. 동네 전경을 보여주지만 사실상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전봇대의 불안정한 불빛. 다시 낮. 동네 어귀에 서 있는 할아버지는 자꾸만 돌아본다. 그 할아버지를 카메라는 줌으로 당겨서 보여준다. 이제까지 이렇게 카메라를 의심하듯이 바라보던 시선은 없었다. 무엇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카메라를 그렇게 쳐다보게 만든 것일까? 카메라도 이제까지 무심하게 지켜보던 것과 달리 할아버지를 망원렌즈로 쫓아간다. 거의 ‘뭉개질 정도로’ 다가간 줌. 그런 다음 놀이터가 보인다. 이때 카메라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저 멀리 아파트촌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여기는 바그다드가 아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 우리가 느끼는 불길함. <호수길>은 그렇게 우리에게 사태를 예감하게 만든다.

침묵. 그저 물이 떨어지는 소리. 회색빛 시멘트 벽을 따라 처마에서 물이 떨어진다. 이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계절을 알 수 있는 시간의 기호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겨울이라는 추위를 보게 만든다. 두 번째. 거기 그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누가 물을 틀어놓은 것일까? 어디서 물이 새는 것일까? 그 물방울은 고드름이 아니다. 말하자면 인적이 사라진 황폐함. 그러나 아직 사람들이 떠나간 것은 아니다. 다시 밤. 무시무시한 밤. 사람들이 사는 마지막 밤. 유리창 너머로 텔레비전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온다. 그 사이로 사람이, 어쩌면 모니터에 보이는 그 누군가가 희미하게 어른거린다. 유령의 흔적. 그가 사람이라면 이 한밤중에 왜 잠들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것일까? 그가 모니터 속의 그림자라면 지금 이 늦은 밤에 누가 보고 있는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저 빛은 무엇인가? 저 푸르스름한 빛만이 남았다. 저건 등대가 아니다. 불 꺼진 동네. 그리고 개 짖는 소리.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때 문득 카메라는 그리운 듯이 하늘을 본다. 어둠 속에서 관용도가 매우 낮은 저가기종의 디지털카메라로 밤하늘을 본다(는 것은 미친 짓이거나 무언가 필사적으로 거기 볼 게 있다는 뜻이다). 프레임을 메우는 지글거리는 그레인. 밤하늘에 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달이 슬그머니 모습을 내민다. 나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낮달이었음을 기억한다. 달은 다시 지워진다.

파리가 들끓는 고양이, 그 무시무시함

42분10초. 다시 여름. 다시 놀이터. 그러나 우리를 잡아끄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청각적 소리이다. 갑자기 유리창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 철거 ‘이후’의 첫 장면.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오른쪽으로 느리게 팬을 하는 이 파노라마 숏은 ‘경축 응암 제8구역 관리처분 계획인가’라는 플래카드를 보여준다. 집들은 이미 창문이 대부분 뜯겨나갔고 거리는 마치 지금 막 폭탄 테러를 당한 듯이 파편이 나뒹굴고 있다. 이 스산한 바람소리. 나뭇잎들은 그때처럼 펄럭이고 있다. 두개의 펄럭임. 플래카드와 나뭇잎. 우리가 몇번이고 본 그 골목길을 따라 카메라는 느리게 뒤로 걸어간다. 이동한다고 말하는 대신 걸어간다, 고 말한 이유는 명백히 이 후진 트래킹숏은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말 그대로 손으로 들고 뒷걸음질치면서 찍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나가버린 이 동네에서 정재훈이 마주치는 건 거의 부서져버린 화단에서 놀고 있는 한 마리 고양이다. 이때 우리는 이 고양이를 이제까지 정재훈이 사람을 보여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찍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지나치게 줌으로 다가가서 픽셀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로 뭉개져버린 화면. 왜 정재훈은 사람과 고양이를 같은 방법으로 찍고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의인화의 숏.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보여주었던 한계 허용치를 벗어난 줌. 정재훈은 거기 있는 건 고양이가 아니라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 어쩌면 뛰놀던 소년 소녀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은 그들을 기억하는 그의 방법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고양이에서 느리게 줌아웃하는 카메라는 카메라와 고양이 사이에 끼어든 두 마리의 나비를 따라 움직인다. 당연히도 이 나비는 CG가 아니다. 우연히 끼어든 나비. 정재훈은 예민하게 그 우연의 리듬을 따라 카메라의 시선을 옮겨간다. 그러나 나비는 매몰차게도 금방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철거는 계속되고 있지만 정재훈은 그 현장에 별 관심이 없다. 그가 보는 것은 오로지 흔적들뿐이다.

정재훈이 고양이 다음에 마주치는 건 골목을 떠도는 개 한 마리이다. 그리고 그 개를 따라간다. 그 개는 우리가 이미 보았던 그 골목, 어린아이가 뛰어놀면서 카메라를 얼핏 바라보던 그곳에서 마치 그 아이처럼 혼자 논다. 누가 버리고 간 것일까? 개는 먹을 것을 찾아서 여기저기 쓰레기통을 뒤진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나간 이 골목에 먹을 것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 불쌍한 개. 그 개의 목에 묶여 있는 목걸이를 보건대 아마도 인도견이었던 것 같다. 그 개 없이 그 개의 주인은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을까? 남아 있는 존재들은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정재훈은 자꾸만 나무를 바라본다. 아니, 차라리 그 참혹한 풍경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눈길을 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멀리서 포클레인이 집을 때려부수는 소리는 쉴새없이 들려온다. 정재훈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길, 이미 우리가 보았던 계단, 카메라가 서 있던 자리를 차례로 방문한다. 거기에 감정을 담는 것은 아니지만 보는 우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풍경 앞에서 쫓겨난 과거의 시간을 본다.

영화가 시작된 지 54분15초. 저 멀리서 공사하는 포클레인.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대 로봇. 부서지는 집들. 날리는 먼지가루. 거기에는 어떤 애도도 없다. 누군가가 두고 간 빨래. 바람에 펄럭이는 이불보. 그 이불이 불러일으키는 상념. 이불은 잠을 잘 때 덮는 것이다. 우리는 잠을 집에서 잘 때 제일 편하다.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서 낯선 곳에서 잘 때의 불편함. 그런데 왜 이불을 두고 간 것일까. 이불이 불편한 짐이 되는 삶을 상상해보라. 이 풍경을 바라보는 건 전봇대의 참새들이다. 정재훈은 마치 그들을 출연이라도 시킨 것처럼 자기 카메라 안에 담는다. 한 마리, 두 마리, 집 저편으로 새떼가 무리를 지어 이곳을 떠난다. 말하자면 이제는 아무도 살 수 없는 곳. 날아갈 수 없는 카메라는 시선을 떨구듯이 땅으로 눈을 돌린다. 거기 우리가 좀전에 보았던 고양이가 죽어서 화단에 버려져있다. 이 말의 방점은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버려졌다는 말은 누군가가 이 고양이를 죽였다는 뜻이다. 누가? 대답은 명백하지만 끔찍하다. 사람들은 이곳을 떠났고 남은 사람은 둘 중 하나이다.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과 지금 이곳을 철거하는 사람. 이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일까?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 이곳을 철거하는 사람에게 가장 귀찮은 건 누구일까? 떠나지 않는 사람. 그를 떠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협박. 가장 무서운 협박은 목숨을 놓고 벌이는 협상이다. 시체를 보여주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위협이다. 파리들이 들끓는 고양이의 시체. 시체가 보여주는 이 장소의 무시무시한 상황. 이때 <호수길>에서 거의 유일하게 노이즈에 가까운 음향효과를 들을 수 있다. 스피커를 찢는 듯한 피드백 노이즈. 시체라는 결과 안에 담긴 폭력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살아본 우리 시대의 철거에 관한 경험의 공유이다. 만일 이 시체를 그저 무심코 지나친다면 매년 전세 이사 걱정없이 사는 당신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집을 부수는 건 추억이 아니라 현실

<호수길>은 시종일관 거리에서, 골목길에서, 계단에서 진행된 영화이다. 하지만 56분30초가 되었을 때 정재훈은 집 안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가 집 안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것은 아니다. 집은 이미 모두 부서졌고 거기에는 삶의 흔적이 없다. 정재훈은 방 안에서 거의 중얼거리는 것 같다. 도대체 집 안과 바깥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때 누구라도 깜짝 놀라게 쾅, 소리가 들리면서 바람결에 문이 닫힌다. 이 소름끼치는 소리. 사람 없는 집에서 문을 여닫는 바람. 카메라가 방 안을 둘러보기 위해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면 뜯겨져나간 창문 바깥에서는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고 있다. 그때 여닫히는 방문 소리와 기울어져가는 천장, 비틀리는 건축물의 기둥이 내는 사운드는 마치 사라져가는 집이 내는 신음소리처럼 무겁고 비통하다.

<호수길>의 마지막 장면은 7분15초 동안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는 단 하나의 숏이다. 주변은 이미 다 부서져서 그 많던 집들은 사라졌고 마치 공터처럼 텅 빈 공간에 세채의 집이 서 있을 뿐이다. 폭탄을 맞은 것 같은 풍경. 아니, 차라리 여기는 달 표면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중 가운데 집을 포클레인이 부수기 시작한다. 정재훈은 그걸 바라본다. 이 장면은 너무 짧다. 여기서 이 시간은 특별한 호소이다. 7분15초는 이층집 한채를 완전하게 다 때려부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사건없는 사건. 패배가 불 보듯한 상황의 정치학. 집은 우리의 삶의 방어선이다. 그것을 갖기 위해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내가 알지 못하는 협상 테이블에서 재개발 결정이 난다. 그런 다음 그 집을 부수는 데는 고작 7분15초면 충분하다. 폭력적으로 기획된 질서. 그것을 당해낼 수 없는 가여운 존재의 슬픈 지리학. 정재훈은 두번 이 동네를 마지막으로 360도 회전하면서 바라본다. 거의 다 부서져버린 동네. 그게 단지 기억의 철거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집을 부수는 건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다. 푸르른 하늘. 맑게 갠 날 떠 있는 한점 구름.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 응암2동은 그렇게 거의 다 부서졌다. 그런 다음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진 장면.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불꽃. 우리 마음에 있는 그 꽃. 그저 재가 되게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그 꽃을 온 들판에 피어오르게 할 것인가. 기다림. 기대가 와야 할 미래. 기대, 그리고 미래.

“나는 집 밖으로 나가서 동네를 오랫동안 쳐다보곤 했다. 그렇게 동네에 머무르면서 내가 보고 들었던 게 이야기가 되었다” 정재훈 자신의 <호수길>의 소개의 글. 그 비통한 과거완료시제. 이제 그는 더이상 이 동네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오랫동안 쳐다볼 만한 것도 없어졌을 것이다. 더이상 보고 들을 만한 것도 없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길>은 푸닥거리가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 이 침묵으로 가득 찬 영화는 요구한다. 정당한 요구. 요구의 정의. 응답하라! 당신이 대답할 차례이다. 함께 대답할 당신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해피 뉴 이어!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